말이 목에 걸렸던 순간

이번 주 설교를 준비하다가, 얼마 전 회의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해야 할 말이 있었는데, 분위기를 살피다가 결국 삼켰습니다. 그 순간에는 그게 최선처럼 느껴졌는데, 돌아서고 나니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누가 어떻게 들을지가 먼저 떠올랐던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얼마 전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몇 주 뒤, 훨씬 무서운 자리인 공회 앞에서는 오히려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자기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요.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장면입니다.
저는 이 차이가 오래 궁금했습니다. 갑자기 용기가 생긴 걸까 싶었는데, 본문을 다시 읽으며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베드로는 이 자리에서 성령이 채워 주신 사람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그 능력이 임하기 전, 그에게는 먼저 다른 일이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을 정죄했던 바로 그 기억 위로 다시 찾아와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던져 주신 일이었습니다. 나무라지 않고, 그저 다시 물어봐 준 것이었습니다. 떳떳해져서 입을 연 게 아니라, 이미 받아들여지고 채워진 뒤에 입이 열린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말을 삼켰던 순간마다 비슷한 게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반응이 무서웠지, 정작 제가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는 잊고 있었습니다. 청중이 백 명이라고 느낄 때는 늘 흔들렸고, 하나님 한 분 앞이라는 사실을 놓치는 순간 곧바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설교하는 자리에 서면서도 이 흔들림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게, 부끄럽지만 사실입니다.
존 뉴턴이라는 사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노예선 선장이었던 그는 폭풍 속에서 하나님께 돌아온 뒤에도, 자기가 한 일을 스스로 고백하기까지 사십 년 가까이 걸렸습니다.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아직 입이 안 떨어졌던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훗날 그가 쓴 찬송 한 줄은, 눈이 멀었다가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고백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를 말하게 한 것도 용기가 아니라, 자기 같은 사람을 살려 준 은혜를 뒤늦게 알아본 마음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 회의 자리로 다시 돌아간다면, 저는 여전히 망설일 것 같습니다. 다만 이제는 그 망설임을 조금 다르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겁내는 대상이 사람들의 반응인지, 아니면 제가 정말 본 것인지를요. 답이 매번 자랑스럽지는 않겠지만, 언젠가는 저도 삼켰던 그 말을 다시 꺼낼 수 있겠지요.
이 글은 2026년 9월 13일 주일예배 설교 「막을 수 없는 이야기」(사도행전 4:13-22)를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