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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목록, 내려놓으셔도 됩니다

디딤 · 2026년 8월 15일

딥그린 배경 위에 기울어진 저울이 수평을 찾고 그 아래 네 개의 추가 내려놓인 모습을 담은 그래픽

우리는 저마다 목록을 하나씩 들고 삽니다. 이 정도 하면 되겠지, 하고 스스로 매기는 목록입니다. 그런데 그 목록에는 끝나는 지점이 없습니다. 미가서에는 바로 그 질문을 들고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이 나오고, 하나님의 대답은 우리가 기대한 것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분은 액수를 정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저울을 치우셨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목록을 하나씩 들고 삽니다

직장에서는 이 정도 하면 인정받을까를 셉니다. 관계에서는 얼마나 더 맞춰 줘야 하나를 셉니다. 부모 노릇에서는 뭘 더 해 줘야 하나를 셉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도 똑같이 셉니다.

저는 오래 그렇게 살았습니다. 새벽에 나간 날을 세고, 맡은 일을 세고, 드린 것을 셉니다. 세다 보면 마음이 조금 놓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계산이 끝나는 날이 오지 않습니다.


미가서의 그 사람은, 인색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미가서에는 하나님 앞에 선 한 사람의 말이 나옵니다. 무엇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느냐고 그는 묻습니다.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갈까, 아니면 숫양 천천 마리일까, 강물처럼 흐르는 기름 만만이면 될까, 그러다 마지막에는 자기 맏아들까지 말합니다.

읽어 보면 금방 보입니다. 이 사람은 덜 드리려던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계속 올립니다. 송아지에서 숫양 떼로, 기름 강물로, 끝내는 자기 아들까지 갑니다.

왜 이렇게까지 올라갈까요. 저는 이 점층을 이렇게 읽습니다. 본문은 그가 왜 액수를 올렸는지 이유를 밝히지 않습니다. 다만 그 질문이 “내가 무엇을 가지고”로 시작해 끝까지 자기 쪽에만 머문다는 것, 그리고 되돌아오는 대답이 그 질문 안에는 없다는 것은 본문이 보여 줍니다. 값을 정해 줄 이가 말이 없을 때, 셈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액수를 올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모습이기도 합니다. 저도 한 번도 “됐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계속 올렸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묻지 않게 되었습니다. 묻는 법을 잊어서가 아닙니다. 물어도 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음 문장에서, 주어가 바뀝니다

그 사람의 질문 바로 뒤에 하나님의 대답이 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여기서 한 가지만 보시면 좋겠습니다. 주어가 바뀝니다.

앞의 질문은 전부 “내가”였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내 맏아들을, 내 몸의 열매를. 그런데 대답은 **“주께서 네게 보이셨나니”**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그 정도면 됐다”고도, “더 내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액수를 아예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이미 보여 주신 것을 상기시키셨습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읽습니다. 하나님은 저울을 치우셨습니다. 눈금을 고쳐 주신 게 아니라, 저울 자체를 치우셨습니다. 우리 쪽에서 계산할 수 있는 일이 애초에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대답은 참 어렵습니다

여기서 그 세 가지를 “이제부터 이렇게 살라”는 목록으로 읽으면, 우리는 방금 내려놓은 저울을 다시 집어 드는 셈이 됩니다. 정의 항목, 인자 항목, 겸손 항목. 항목이 셋으로 줄었을 뿐 셈은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다시 보면 요구의 성격이 다릅니다. 인자를 행하라고 하지 않고 사랑하라고 합니다. 성경은 늘 그렇게 요구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막힙니다. 손은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좋아하는 마음은 제가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억지로 하는 친절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이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은 결심한다고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대답은 우리를 더 깊은 자리로 데려갑니다. 할 일 목록이 아니라, 할 수 없다는 자각으로.


그런데 미가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같은 책의 마지막에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여기서 한 단어를 붙잡습니다. 인애, 히브리어로 **헤세드(chesed)**입니다.

앞에서 우리에게 요구했던 바로 그 단어입니다. 인자를 사랑하라고 하셨던 그 인자. 그런데 마지막에 그 헤세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되돌아옵니다. 우리가 만들어 내지 못한 그것을, 정작 기뻐하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죄를 어떻게 하셨는지 보십시오. 씻어서 돌려주신 게 아니라, 깊은 바다에 던지셨습니다. 우리가 손을 씻은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버리신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죄가 없던 일이 된 것이 아닙니다. 같은 문장이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진노가 없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 진노는 어디로 갔습니까. 여기서부터는 미가서가 직접 말하는 대목이 아닙니다. 미가서는 죄를 던지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까지 말하고, 그 죄가 어디에 놓였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 자리를 밝히는 것은 신약이고, 그래서 이 아래는 성경 전체의 빛에서 읽는 신학적 종합입니다. 저는 그 구분을 흐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 빛에서 보면,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증서를 지우신 방식이 십자가였다는 것입니다. 값이 없어서 지워진 것이 아니라, 그 값이 다른 자리에서 치러졌기 때문에 지워졌습니다. 이사야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라고 노래한 것도, 베드로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라고 쓴 것도 같은 자리를 가리킵니다.

값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대신 치르셨습니다.


그래서, 목록을 내려놓아도 됩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계산이 끝나지 않던 것은 — 그것이 애초에 우리 쪽에서 셀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눈금을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저울을 치우셨습니다.
  • 저울을 치우고도 죄가 없던 일이 되지 않은 것은 — 값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자리에서 치러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손을 씻은 것이 아니라, 그분이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셨습니다.
  • 물어도 답이 없어 끝내 묻지 않게 되었던 것은 — 사실 그 침묵이 전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미가서 앞부분을 보면, 우리가 묻기를 그만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먼저 말을 걸어오십니다.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언하라.

그러면 정의와 인자와 겸손, 그 세 가지는 무엇이 됩니까. 자격을 증명하는 항목이 아니라, 이미 받은 사람의 걸음이 됩니다. 순서가 뒤집힌 것입니다. 살아서 받는 것이 아니라, 받았으므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들고 계신 목록을 내려놓으셔도 됩니다. 그 목록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거기 적힌 섬김과 수고와 헌금은 전부 선한 것입니다. 문제는 드린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값을 치렀다고 여긴 마음이었습니다.

내려놓고, 그분이 하셨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우리 모두가 그 목록을 하나씩 들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 글의 성경 본문

이 글은 구약 미가서를 따라 읽었고, 진노가 놓인 자리를 다룬 대목만 신약의 빛에서 종합했습니다. 정확한 위치를 찾아보고 싶은 분을 위해 남깁니다.

글에서 다룬 대목 위치
“내가 무엇을 가지고 나아가며…” 송아지·숫양·기름·맏아들 미가 6장 6~7절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미가 6장 8절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미가 6장 3절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미가 7장 18~19절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골로새서 2장 14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이사야 53장 5절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베드로전서 2장 24절

인용은 개역개정을 따랐습니다. 줄임표(…)는 중략을 뜻합니다.

2026년 8월 16일 주일 · 디딤교회